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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 광주(廣州) 혜목산(慧目山) 고달원(高達院) 고(故) 국사(國師) 임금의 명령에 따른 추중 시호 원종(元宗)대사 혜진(慧眞)의 탑비명과 서문.
광록대부(光祿大夫) 태승(太丞) 한림학사(翰林學士) 내봉령(內奉令) 전(前) 예부사(禮部使) 참지정사(參知政事) 감수국사(監修國史) 신(臣) 김정언(金廷彦)1)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찬술함.
봉의랑(奉議郞) 좌윤(左尹) 전(前) 군부경(軍部卿) 겸 내의승지(內議承旨) 사인(舍人) 장단설(張端說)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비문을 쓰고 전액(篆額)함.
대저 해는 부상(扶桑)2)에서 떠올라 인간이 우러러 바라보게 되었고 부처는 천축에서 태어나 세상이 귀의하게 되었다. 군자의 나라에서 부처의 도를 배우고 익히게 하였다.
이른 바 도(道)는 마음 밖에 있지 아니하고 부처는 몸 가운데 있다 하겠다. 그런 까닭에 도의 높은 것을 얻으면 이끌어주는 스승이 될 수 있고 덕(德)의 후한 것을 얻으면 자비로운 아버지가 될 수 있다. 이에 부처의 행적을 인연으로 하여 드디어 대사의 마음을 보이니 빛남이 물위의 연꽃과 같고 발기는 별 가운데의 달과 같으니 실로 대사가 그런 사람이다.
대사의 존칭은 찬유(璨幽)이고 자(字)는 도광(道光)이며 속성(俗姓)은 김(金)씨로 계림(鷄林) 하남(河南)인이다. 손손이 저명한 종족이며 대대로 명문가문이다. 존숭받는 선조의 맑은 규범과 집안의 아름다운 족적은 생략하고 기록하지 아니한다. 석가의 종지(宗旨)를 따른다.
아버지의 성함은 용(容)인데 흰 무지개의 영롱한 기운과 붉은 굴의 기이한 자태를 가졌으며 노을 같은 아름다운 비단의 넘치는 광명을 머금고 서리와 쇠북의 단아한 운치를 떨치었다. 드디어 집안을 일으켜 창부낭중(倉部郎中)이 되고 얼마 아니되어 장사현령(長沙縣令)이 되어 백리 지역에 춘풍이 통행하는 교화(敎化)는 꽃핀 고을에 향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고 임금을 향한 마음은 해바라기 뜰에서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조야(朝野)가 이로 인하여 기대고 신뢰하고 향리가 이로 인하여 바라보고 의지하였다.
어머니 이씨는 부덕을 닦아서 어머니로서의 의례를 갖추었다. 꿈에 한 신인(神人)나타나 고하기를, “원컨대, 어머니로 삼아 아들이 되고, 부처님으로 삼아 손자가 되어서 오묘한 인연을 필연적으로 의탁하여 자비로운 교화를 경건하게 펼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특별한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임신이 되니 말씀을 삼가고 삼가 태교를 경건히 수행하여 함통(咸通) 10년(869)3) 세차(歲次) 기축(己丑) 4월 4일에 대사를 낳았다.
대사는 일찍이 싹수가 좋고 오묘한 성과가 지체되지 아니하여 나이 겨우 13세에 마침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비록 지혜는 부족하나 깨닫게 되기를 기약합니다.” 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가 막되어 눈이 어둡지만 일찍이 너의 선량한 근본을 보았다. 너는 마땅히 열심히 배양하여 좋은 결과를 닦아야 할 따름이다.” 라고 하였다.
대사는 소원이 우연히 들어맞아서 곧 바로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상주(尙州) 공산(公山) 삼랑사(三郞寺) 융체(融諦)선사가 도를 논함이 깊고 그윽하며 사람을 교화함이 혁혁하다는 것을 전해 듣고 제자가 되기를 바라고 멀리 선사를 찾아뵈었다. 선사가 말하기를, “너를 대하여 오늘 방문한 의례(儀禮)를 보니 후일 유리하게 쓰이게 됨을 알겠다. 우리 종파 선교 화상은 법호가 심희(審希)인데, 참으로 한 부처로 세상에 나와 동쪽을 교화하는 주인이 되었다. 지금 혜목산(慧目山)에 계시니 네가 마땅히 가서 스승으로 섬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대사는 이분이 내 스승이며 바로 내가 바라던 바니 지체하지 않고 가야 유리함이 더 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혜목에 곧 바로 찾아보니 진실로 마음에 지니고 있는 뜻과 합치하였다. 이에 도를 배우는 마음을 더욱 닦고 참선을 익히는 뜻을 배로 힘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묘리를 정밀하게 궁구히 하고 현묘한 기틀을 높이 깨우쳤다. 각성(覺醒)의 노정(路程)을 수행하여 비록 통달하였으나 율법과 계율에 의해 행하였다. 나이 스물둘에 양주(楊州) 삼각산 (三角山)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에 인초(忍草)의 싹을 틔운 후, 계율의 구슬이 광채를 발한 시초에 더욱 더 도를 찾는데 피곤함을 잊어버리고 스승을 찾아가는 것에 게으름이 없었다.
이때에 본래의 스승께서 광주(光州)의 송계(松溪)선원으로 옮기니 대사는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서 특별히 송계에 가서 뵙고 발에 예를 표하는 충정을 펼치고 주액(鑄額)4)의 현묘한 가르침에 감사하였다. 스승께서 이르기를, “흰 구름은 천리에 있으나 만리에 있으나 똑 같은 구름이고, 밝은 달은 앞내에 있거나 뒷내에 있거나 같은 달이다. 그 모든 것은 인식과 인식에서 기인하며 마음과 마음마다에 있을 뿐이다.” 라고 하였다. 대사는 “무릇 도에 뜻을 둔자가 어찌 일정한 스승이 있겠는가?” 라고 생각하여 멀리 유학하여 널리 관찰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스승께서 대답하여 이르시기를, “다른 마음을 정지시킬 수 없고, 빠른 발은 만류하기 어렵다고 하더니 내가 그대에게서 그것을 경험하는구나.” 라고 하시고 웃으면서 떠나는 것을 허락하였다. 대사는 도가 멀다고 하지만 가면 될 것이라 하고 바로 산을 나와 바다에 연하여 서쪽으로 떠나갈 인연을 기다려 보았다. 경복(景福) 원년(892)5) 봄에 마침 장삿배가 중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있어서 마침내 몸을 기탁하여 싣고 서쪽으로 갔다. 곧 바로 구름과 물을 바라보며 마음대로 연기와 노을을 지향하여 발바닥이 닳도록 다녔다. 스님으로서 참다운 스님은 반드시 찾아뵙고 유적으로서 오래된 것은 반드시 찾아갔다. 드디어 서주(舒州)의 동성현(棟城縣) 적주산(寂住山)으로 가서 투자선(投子禪)화상을 배알하였다. 화상의 법호는 대동인데 석두산(石頭山)의 법손인 취미(翠微) 무학(無學)대사의 정식 후계자이다. 대사의 연꽃 같은 눈의 빼어난 자태와 구슬 같은 이마의 특이한 관상을 보고서 말하기를, “동쪽에서 유학을 와서 서학을 구한다고 말하는 자 있었지만 더불어 도를 논의할 자는 오직 그대뿐이다.” 라고 하였다.
대사는 이에 혀 밑에서 미묘한 말씀을 깨닫고 몸 가운데에 있는 참된 부처를 인식하였으니 어찌 선서(善逝)6)의 밀전을 계승하여 정명(淨命)7)의 묵대(默對)를 받드는데 그치겠는가? 대사가 떠나려하자 투자화상이 부탁하여 말하기를, “멀리가지 말라. 멀리가지 말라.”고 하니 대삭사 대답하기를, “비록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만 멀고 가까움에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정지하거나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화상이 말하기를, “이미 이심전심을 경험하였으니, 구태여 눈으로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앞으로 뛰어난 벗을 널리 구하고 높은 스승을 두루 알현하며 천태(天台)8)에서 은밀함을 탐색하기도 하고 혹은 강좌(江左)에서 현묘함을 찾기도 하여 진정한 여러의 본성의 바다에 진입하고 마니(摩尼)의 보배로운 구슬을 획득하라.” 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봉새는 천지에서 반드시 변하고 학은 모름지기 요해(遼海)로 돌아오니 시종일관 일념으로 바라보다가 마침 본국으로 귀환하는 배가 있어 인하여 동으로 항해하여 정명(貞明) 7년(921)9) 가을 7월에 강주(康州)의 덕안포(德安浦)에 도달하였다. 서둘러 봉림(鳳林)에 가서 진경대사(眞鏡大師)에게 귀국인사를 하였다. 진경대사가 이르기를, “바로 오늘을 맞이하여 상봉하게 되어 몹시 기쁘도다.” 하였다. 특별히 선당을 꾸며서 정돈하고 담화의 좌석에 올라 서쪽으로 방문하여 얻은 진정한 법도를 듣고 동쪽으로 귀환한 오묘한 인연을 경축하고 권유하여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노소가 있지만 법도에는 선후가 없다. 너는 여래의 은밀한 인장을 지참하고 가섭(迦葉)10)의 비종을 풀이하였으니 삼랑사(三郞寺)에 살면서 선백(禪伯)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대사는 그대로 받들어 주석하였다. 3년이 지나자 이 사찰이 정말로 도를 즐기는 청정한 재실이고 그야말로 선을 안정되게 하는 뛰어난 근거이지만, 일찍이 새라도 나무를 선택하는데, 내가 어찌 오이를 감싸고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삼가 들으니, 우리 태조 신성대왕은 북두성을 가슴에 품고 표창을 거머쥐고 새 왕조를 여시며 하나라가 보살핌을 받는 하늘의 명령을 받고, 주나라가 떠오르는 태양의 지방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마침내 조각달로 허공을 유람하며 외딴 구름으로 산봉우리를 출몰하니 마치 푸른 용이 파도를 다스림에 본래 뗏목에 의지할 마음이 없고 붉은 봉황이 허공을 찌름에 오동나무에 깃들고자 하는 뜻이 있음과 같았다. 멀리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훌쩍 왕경에 가서 드디어 태조대왕에게 들어가 알현하였다. 대왕은 대사의 그윽한 도리가 두루 통달하고 본받을만한 위신이 원만하게 갖추었다고 생각하여 광주(廣州)의 천왕사(天王寺)에 머물기를 청하니 마침내 그 말씀에 따라 그곳에 거처하였고 거처하자마자 교화가 이뤄졌다. 그런데 혜목산(慧目山)이 그 안개 산은 연회의 좌석으로 아주 마땅하고 구름 계곡은 참선의 거처로 매우 좋아서 옮겨 거처하였다. 이에 사방의 먼 곳에서 나루를 묻는 사람들이 천리를 반걸음처럼 여기고 구름처럼 오는 자를 바다처럼 받아들였다. 선량한 길을 분주하게 달려와 간절하게 구하니 그윽한 문을 출입하며 단 한 번에 구제받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태조가 마침 뜻밖에 서로 만남에 인연을 표시하고자 하여 하납의(霞納衣)와 좌구(座具)11)를 보냈다. 얼마 안 있어 태조가 승하하자 선량하게 시작하였던 꽃다운 인연을 생각하고 마지막의 현로(玄路)를 꾸미는 것을 인도하였다. 혜종대왕(惠宗大王)이 왕위를 계승하여 선왕을 봉안하여 효를 따르고 어짐을 일으키어 풍속을 교화하고 부처를 중시하고 승려를 존경하여 차와 비단, 법의를 보내었다. 대사는 불심으로 계도하고 신통력을 베풀었다. 그후 3년(946)에 공왕(恭王)이 승하하고 정종대왕(定宗大王)이 왕업을 계승하여 진풍(眞風)을 우러러 보고 운납가사(雲衲袈裟)와 마납법의(磨衲法衣)를 보내니 대사가 몹시 기뻐하였다. 대사는 임금께서 불사를 진흥시키려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지만 대궐에 궁궐의 수레가 잠시 머물다가 인간 세상에 갑자기 신발을 벗어버리실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지금의 임금께서 태자로 뽑혀 기틀을 계승하시고 보좌에 앉아 국가를 다스렸다. 거울을 잡고 용방(龍邦)의 습속을 비추시고 피리를 불어 취령(鷲嶺)12)의 풍속을 넓혔다. 임금님의 공적을 더욱더 드러내시고 부처의 교화를 한층 숭상하였다. 대사는 심왕(心王)의 묘결을 보여주고 각제(覺帝)의 미묘한 말씀을 선포하였다. 맑은 거울이 피곤함을 잊고 큰 종이 두드리기를 기다리니 중생이 배우려고 벼와 삼처럼 줄을 잇고 친구들이 방문하여 복숭아와 오얏나무의 길을 이루었다. 임금께서 이에 신앙이 향상되어 마음이 깊어지며 공경함이 이어져 뜻이 지극해지니 드디어 증진대사(証眞大師)라는 호를 부여하였다. 연달아 불법과 속계의 높은 사신을 파견하고 조서를 재빠르게 내리시어 금성(金城)으로 불러들였다. 대사는 도가 장차 성행하려 하니 때를 놓칠 수 없지만 마침 부탁이 왔으므로 내 가리라 생각하고 드디어 호계(虎溪)를 나가 특별히 대궐에 나아갔다. 이때에 흰 눈썹의 청정한 무리와 백로처럼 늘어선 여러 영웅들이 법안(法眼)을 쳐다보고 구슬처럼 연이었고 자비로운 얼굴을 상대하여 빙 둘러 숭앙하면서 마중 나와 왕성의 사나원(舍那院)에까지 이르렀다. 다음날 임금이 사나원에 행차하여 말씀하기를, “제자는 동쪽 수풀을 바라보며 목을 빼고 남쪽 시내를 향하여 마음을 기울이니 스승께서는 기미를 따름이 회오리바람 부는 골짜기의 소리 같고 감응에 나아감이 달 비추는 못의 그림자 같소. 바라보고 귀의함이 더욱 더 절실하고 천착하고 숭상함이 갈수록 심해지오.” 하였다. 3일이 지나 중광전(重光殿)에서 법연(法筵)을 열었는데 금란가사를 끌고 자주 빛 궁전에 이르자 임금께서 과일 같은 입술을 바라보며 선법을 듣고 기뻐하시고 연꽃 같은 눈을 정성으로 받드셨다. 보배로운 구슬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자리를 피하는 의례를 배려하시고 온 나라에 말씀을 띠에 새기는 뜻을 펼치셨다. 삼보에 귀의함이 더욱 간절해지고 십선(十善)13)을 더욱 닦으셨다. 마침내 겨자씨로 채운 성 안이 비게 되고, 옷으로 간 돌이 다 닳도록 반드시 성인을 알현한 선량한 인연이 끊어지지 않고 스승으로 삼은 아름다운 도리가 무궁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그 자리에서 면복을 내리시고 국사로 받드셨다. 향화(香火)의 인연을 맺고 진실되게 스승으로 모시는 예의를 갖추었다. 인하여 답납가사, 마납복(磨衲福), 좌구(座具), 은병(銀甁), 은햐로, 금구, 자발, 수정, 염주를 바치셨다. 대사는 못 같은 마음에 달이 있고 산맥 같은 이마에 구름이 없듯이 한 마음으로 오묘한 각성과 풍조를 선포하고 천의 눈으로 위대한 자비의 교화를 시현하였다. 임금은 마침내 크게 기뻐하여 말씀하시기를, “제자는 그윽한 말씀을 듣고 도에 도달하고, 오묘한 논지를 이어서 기미를 알았으니 받들어 두루 펴서 실추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천덕전(天德殿)에서 법연을 높이 열고 원해(願海)의 바다에서 천 개의 파도를 기울이고 마음의 향불에 하나의 심지를 태웠다. 대사가 마음의 향불에 심지를 살랐다. 대사가 막 티끌의 꼬리를 휘저으며 용의 턱을 움직이자 한 승려가 “어떻게 해야 한 길로 올라갈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대사가 말하기를, “천 분의 성인을 추종하여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천 분의 성인을 추종하여 얻는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위로부터 전승한다 함은 어디서 나온 말입니까?” 하니 대사가 대답하기를, “바로 천 분의 성인을 추종하여 획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위로부터 전승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그렇다면 이조(二祖)14) 혜가(惠可)가 서쪽 천축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달마가 당나라 땅에 도착하지 않았어야 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였다. 대사가 말하기를, “비록 천 분의 성인을 추종하여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달마는 헛되이 지나온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사람과 하늘이 감응하고 현인과 성인이 환희하며 꽃비가 공중을 날고 박달나무 향 연기가 해를 가리니 저 마등(摩騰)이15) 한(漢)에 다다르고 승회(僧會)가 오(吳)에서 노닐 때, 그 부처님을 받든 큰 공로와 승려에 귀의한 고유한 아름다움도 이보다 더 할 수 없었다. 이른바 사방이 모두 빈객으로 오고 만세토록 영원히 의뢰하며 바로 지혜의 해가 다시 공중에 뜰 즈음이며 어진 지역이 크게 변화하는 시점이었다.
대사가 마침내 말하기를, “노승은 나이가 들었고 이빨도 부들이나 버들처럼 약해졌으니 다만 송문(松門)에 가서 발걸음을 쉬고 금대궐을 향하여 마음을 귀의하기 바랄 따름입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은 비록 자애로운 얼굴을 그리워하나 그윽한 취지를 존중하여 따랐다. 코끼리 수레를 바라보며 마루에 공경의 예의를 표시하면서 눈으로 송별하고 기러기 같은 사찰을 우러러보며 마음을 기울였다. 후에 별 같은 기마를 달려서 감정을 전달하고 임금의 서한을 날려서 간절함을 묘사했다.
이에 송덕시를 지어 기탁하여 바쳤다. “지혜의 해가 높이 걸려 바닷가 고을에 비추는데, 전신은 고요하게 조화의 광채를 발하네. 범패 가운데 법도를 펼쳐서 미혹한 행로를 열어주시니, 그릇 뒷면에 연꽃이 자라 선정의 경지에 들어갔구나. 한 번 소리치니 음악이 되어 안개를 걷어 들여 청정하게 하고, 두 번의 범문으로 현상을 떠나고 속세를 벗어나 상쾌하네. 현관(玄關)16)은 멀리 산천을 사이에 두고 밖에 있으니, 물결이 세차게 일어 산방(山房)에 가서 배알하지 못함을 한하노라.” 라고 하였다. 연이어 오정17)의 향기로운 차와 단교의 유명한 향을 선물하여 신심을 표현하고 법력을 멀리 기원하였다.
대사는 스스로 천제의 대궐을 떠나와서 구름 산중에 도착하니 연기와 쑥은 머물고 거닐기에 더욱 흡족하고 물과 돌을 베고 칫솔질하기에 아주 마땅하였다. 마음에 걸림이 없어 임종할 뜻을 가졌다. 이에 털옷을 거머쥔 승려들이 바람처럼 달려오고 재를 주관하는 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대사는 색과 공이 모두 사라지고 정(定)과 혜(惠)가 아울러 원만하여 지극한 도리를 산중에서 실행하고 그윽한 공덕을 우주 안에서 보시하였으니 부처가 각성하여 신성하게 변화하였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현덕(顯德) 5년(958)18) 무오(戊午) 가을 8월 25일에 대사가 돌아가시려 하면서 세수와 목욕을 끝내고 방 앞에서 무리를 모두 뜰에 이르게 하고 가르침을 남기셨다. 대사는 “만 가지 법도가 모두 공허하니 나는 이제 갈 것이다. 한 마음을 근본으로 삼아 너희들은 힘쓰거라. 마음이 생기면 법도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법도 사라진다. 사람들의 마음이 부처이니 어찌 씨가 있겠는가? 여래의 청정한 계율을 보호하고 북돋아라.” 라고 하는 말씀을 끝내고 방안으로 들어가 이 사원의 선당에서 단정히 가부좌하고 적멸하였다.
오호라. 동쪽에서 신체에 감응을 받은 지 90년이고 서쪽의 계율에 감복한지 69년이다. 범은 시내에서 소리 내어 흐느끼고 학은 나무에서 슬픈 빛을 띠었다. 문생은 스승이 돌아가신 것을 슬퍼하고, 산간과 세속에서는 성인이 돌아가신 것을 한탄하였다. 불문과 세속의 남녀가 땅을 치고 구르며 통곡하니 소리가 바윗골을 진동하였다. 다음날 신성한 좌석을 혜목산에 옮겨 받드니 안색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 임시로 돌문으로 닫아두었다.
임금이 듣고 선문의 달이 일찍 가라앉은 것을 개탄하고 각화(覺花)가 먼저 진 것을 한탄하였다. 사신을 내려 보내 곡서(鵠書)로 위로하고 시호를 원종대사(元宗大師), 탑호(塔號)를 혜진(慧眞)이라 추증하였으며, 공경히 진영(眞影) 한 폭을 만들고 국공에 명하여 돌을 깎아 무덤을 봉하게 하였다. 문인 등이 부르짖으며 시신을 받들어 혜목산 서쪽 언덕에 탑을 세웠는데, 불가의 법을 준수하였다. 대사는 마음의 등불이 활활 타고, 선정의 법수에 파도가 일지 않으며 지혜의 바다가 융통하며 자비의 구름이 덮여 있었다.
불법을 배워서 선의 덕행을 깨닫고 마귀를 물리쳐서 속세를 진정시키는 위엄이 날카로 왔다. 서쪽으로 가서 현저한 공덕을 유람하고 동쪽으로 와서 높디높은 법도를 교화하였다. 드디어 그릇에 담은 복숭아의 색깔을 더욱 윤택하게 하고 지혜의 물이 빛을 내도록 하였다. 그 성스러운 공덕은 지식으로 알 수 없고 그 신성한 교화는 정신으로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법도의 본체는 형상이 없으나 반드시 형상으로 말미암아 공덕을 베풀고 도리의 실체는 언어가 없으나 반드시 언어로 말미암아 교화를 보인다. 어찌 오묘한 실재로 말미암아 진정한 빈 실체를 체험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의 큰 제자 양가승통(兩街僧統)인 삼중대사(三重大師) 흔홍(昕弘) 등은 법원(法苑)의 명승이요 선문의 귀감이다. 자비로운 우물의 지난 바퀴를 따라서 법구(法矩)의 남은 빛을 이었다. 그들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비록 신비한 설교를 마음에 새겼으나 기이한 행적을 돌에 새기지 않는다면 어찌 하나 뿐인 참 진리의 법을 표현하여 모조리 다 가질 수 있겠는가?” 하고 이에 대사의 행적을 쓰고는 대군의 은혜를 바라고 비문을 지어서 대사의 덕업을 기록해두기를 청하여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한림학사 신 김정언(金廷彦)에게 명령하기를, “고 국사 혜목대사는 행적이 구름과 물 위에 높고 복록이 인간에게 빛나니 너는 마땅히 큰 붓으로 공훈을 기록하여 검은 비석으로 무성함을 기념하라” 라고 하였다. 신은 진땀을 온 몸에 적시고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말하기를, “신은 어두운 먹줄에 쉽게 현혹당하고, 빈 누더기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얕고 짧은 휘들리는 재주로 그윽하고 오묘한 빛나는 행적을 기념하니 마치 달팽이가 궁궐에서 달을 잡고 말이 바다에서 구슬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설사 푸른 하늘이 낮아져 절구공이를 닿는 때가 오고 푸른 바다가 줄어들어 치마를 걷고 지나갈 지경에도 그윽한 공덕이 영원하고 오묘한 행적이 상존하기를 바랍니다. 이로 말미암아 성스러운 덕망의 형용을 감히 찬미하니 장래 승사(僧史)에 그 의를 거듭 펴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다음과 같은 명문을 지었다.
크도다 오묘한 각성이여, 멀도다 진정한 종지여,
개보(開寶) 8년(975)19) 을해 10월 일에 세움. 새긴이 이정순(李貞順)
그윽하디 그윽하게 교화를 보이며 묵묵하게 선풍을 베풀었네.
진정한 소유는 소유가 아니요. 진정한 공허는 공허가 아니다.
연꽃은 물 위에 피고 달은 별 가운데 나온다.
두루두루 쫓아서 바라보고 사람과 하늘이 숭상하네.
그윽한 은하에 뜻을 쏟고 부처의 법리에 마음을 돌린다.
참선의 희열을 맛보고 불법의 희열로 배불렀네.
누가 그러한 마음을 가졌는가? 오직 우리 스승이라.
울창한 제일의 성인이며 믿음직한 허공의 왕이로다.
이심전심으로 고요히 계시니 닳은 족적이 빛을 발하는구나.
유유히 물을 건너와서 당당하게 뗏목을 버리네.
가서는 가섭(迦葉)을 전해오고 와서는 우리나라를 교화하였네.
부처의 해가 다시 떠올라 불법의 구름이 크게 휩쓰네.
나라에서 스승으로 삼아 군신들이 만나게 되었네.
참선의 정원이라 할 만하여 순식간의 은혜의 집으로 변하였다.
계족산에서 잠긴 빛을 임금께서 어찌 만났던가?
건덕(建德) 9년(971)20) 신미(辛未) 10월 21일 원화전(元和殿)에서 대장경을 펴고 읽을 때 황제폐하가 조서를 내려 “나라 안의 사원 중 오직 세 곳만이 문하의 제자들이 동요하지 않고 서로 이어서 대대로 끊어지지 아니하니 이것으로 법도를 삼으라.” 하였다. 이른바 고달원(高達院), 희양원(暿陽院), 도봉원(道峯院)의 주지. 삼보가 모름지기 국왕의 힘에 의지한 것은 석가가 세상에 나와 불법을 말하며 국왕과 대신에게 부탁하여 위촉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 황제폐하께서 석문의 오묘한 이치에 대한 배려가 깊었고 공경함이 무거웠다. 선량한 인연을 같이 맺어서 일상의 법도로 삼았다. 문하 제자 도인과 속인 등의 성명은 다음과 같다.
중대사(重大師) 동광(同光), 중대사 행근(幸近), 대사(大師) 전인(傳印), 대덕(大德) 금경(金鏡), 삼중대사(三重大師) 훈선(訓善), 중대사 준해(俊解), 대덕 승연(勝演), 대덕 의광(義光), 대사 전장(全狀), 대덕 승명, 행희화상(幸希和尙), 행해화상(幸海和尙), 행위화상(幸位和尙), 승총(僧摠) 계정(戒定), 대통(大統) 담흥(談弘), 대덕 행길(幸吉) 등 500여인.
삼강전(三剛殿)
원주승(院主僧) 효안(孝安), 전좌승(典座僧) 행숭(幸崇), 직세승(直歲僧) 법원(法元), 유나승(維那僧) 행온(幸溫)
문하각자승(門下刻字僧) 행언(幸言), 경연(慶然), 종능(宗能), 광규(廣規)
탑명사(塔名使)
태상신보(太相神輔) 부사(副使) 좌윤(佐尹) 영허(令虛)
송장사(送葬使)
정보(正輔) 신강(信康), 부사 좌윤 규강(圭康)
재사(齋使)
원윤(元尹) 수영(守英), 녹승사(祿僧使) 영순(英順)
수비사(修碑使)
경(卿)규응(圭凝), 직무(直務) 헌규(憲規)
장지필연관(掌持筆硯官) 진서(眞書) 좌직학생(左直學生) 이홍렴(李弘廉)
석장(石匠) 잉을희(仍乙希)
병인년(병인년) 비, 탑 시공, 정축년 준공
원주승(院主僧) 효안(孝安)
전좌승(典座僧) 행숭(幸崇)
유나승(維那僧) 행온(幸溫)
직세승(直歲僧) 법원(法圓)
高麗國廣州慧目山高達院故國師制贈謚元宗大師慧眞之塔碑銘幷序
光祿大夫太丞翰林學士內奉令前禮部使參知政事監修國史 金廷彦 奉制撰
奉議郞佐尹前軍部卿兼內議承旨舍人臣 張端說 奉制書幷篆額
觀夫日出扶桑 作人間之贍仰 佛生天竺 爲世上之歸依 俾君子之邦 學法王之道所謂道非心外 佛在身中 故道之尊爲導師 德之厚爲慈父 爰因象跡 遂示它心 光如水上之蓮 皎若星中之月 實大師其人矣 大師尊稱璨幽 字道光 俗緣金氏 鷄林河南人也 孫孫著族 代代名家 尊祖淸規 敬宗芳蹟 刪而不記 道釋宗矣 考諱容 白虹英氣 丹穴奇姿 含霞綺之餘光 振霜鍾之雅 遂起家爲倉部郎中 無何出爲長沙縣令 百里行春之化 花縣勝芬 九重回日之心 葵園着美 朝野因以倚賴 鄕閭所以瞻依 妣李氏 婦德聿修 母儀富有 夢有一神人告之曰 願言爲母爲子爲佛爲孫 故託妙緣 敬敷慈化 以爲得殊夢 因有娠 愼出身文 奉行胎敎 以咸通十年龍集己丑四月四日誕生大師 善芽尙早 妙果不遲 年甫十三 遂言於父曰 雖乏惠柯 祇期覺樹 父因謂曰 吾縱□瞳子 嘗見汝善根也 汝宜孜孜培之 移勝果而已 大師以邂逅適願 卽落髮出家 伏承尙州公山三朗寺融諦禪師 論道玄玄 化人赫赫 願爲弟子遙禮禪師 禪師若曰 格 汝 見今日之來儀 認他時之利見 吾宗禪和尙 法號審希 眞一佛出世 爲東化主 見在慧目山 汝宜往師事之 大師以是吾師也 適我願兮 得不時然後 利有攸往 便詣慧目 允叶服膺 增修學道之心 倍勵習禪之志 未幾精窮妙理高悟玄機 行覺路以雖通 仗律儀而斯在 年二十二 受具於楊州三角山莊義寺 於是 忍草抽芽之後 戒珠瑩色之初 尙以問道忘疲 尋師靡懈 時 本師移住光州松溪書院 大師遠携笻杖 特詣松溪 申禮足之素衷 謝鑄顔之玄造 師謂曰 白雲千里方里 猶是同雲 明月前溪後溪 嘗無異月 爰因識識 只在心心而已 大師以爲凡志於道者 何常師之有 迺告以遠遊泛覽 師因謂曰 佗心莫駐 迅足難留 吾於子驗之 笑而聽去 大師以道之云遠 行之則是 迺出山並海 覗西汎之緣 景福元年春 適有商舶入漢者 遂寄載而西 卽以望雲水以從心 指烟霞而抏跡 僧之眞者必詣 跡之古者必尋 遂往舒州桐城縣 謁投子祥和尙 法號大同 是石頭山法孫翠無學大師之嫡胤也 見大師蓮目殊姿 玉毫異相 乃曰 其有東流之說 西學之求者 則可以與言道者唯子矣 大師於是 悟言於舌底 認眞佛於身中 豈止於承善逝之密傳 奉淨名之默對而已矣 大師將辭 投子和尙因謂曰 莫遠去 莫遠去 大師答云 雖然非遠近 要且不停留 和尙曰 旣驗心傳 何須目語 爾後旁求勝友 歷謁高師 或索隱於天台 或探玄於江左 入眞如之性海 得摩尼之寶珠也 迺以鵬必變於天池 鶴須歸於遼海 有始有卒 念玆在玆 適値本國歸舟 因而東棹 貞明七年秋七月 達康州德安浦 逕詣鳳林 歸覲眞鏡大師 師曰適當今日 深喜相逢 別飭禪堂 俾昇譚座 聽西訪之眞法 慶東歸之妙緣 從容謂曰 人有老少 法無先後 爾其佩如來之密印 演迦葉之秘宗 宜住三朗寺爲禪伯矣 大師應奉而住更三冬 迺以爲當寺 誠樂道之淸齋 乃安禪之勝踐 尙以鳥則擇木 吾豈匏瓜 伏聞我太祖神聖大王 懷斗膺期 握符啓聖 華夏受顧天之命 載周興出日之邦 遂乃片月遊空 孤雲出由由 彼蒼龍濟浪 本無憑筏之心 丹鳳冲虛 猶有栖梧之志 遠携黎杖 遙詣玉京 遂入覲太祖大王 大王以大師玄道周行 法身圓對 艿請住廣州天王寺 遂從之住焉 居則化矣 而以慧目山乃霞嶠偏宜於宴坐 雲溪甚愜於禪居 移而住焉 於是四達問津者 視千里猶跬步如雲來者 似海納之 莫不犇馳 善導□□以憧憧 出入玄門而濟濟 太祖方當際會欲表因緣 送霞衲衣幷坐具 未幾太祖 天崩杞國 日入虞泉 念善始之芳因 列終之玄路 惠宗大王 踐阼思恭 奉先追孝 興仁化俗 重佛尊僧 贄以茗馞幷紋羅法 衣大師啓以佛心 陳之神力 越三年恭王昇遐 定宗大王 統承寶業 瞻仰眞風 送雲衲袈裟磨衲法衣 大師深喜聖朝 聿興佛事 豈悟遽宮車於雲間 俄脫屣於人寰 今上當璧承基 堊衣理國 握鏡炤龍邦之俗 吹箎弘鷲嶺之風 益顯聖功 增崇佛化 大師演心王之妙訣 宜覺帝之微言 朗鏡忘披 洪鍾特扣 衆學有稻麻之列 朋來成桃李之蹊 上乃信向心深 欽承志至 遂奉師號爲證眞大師 仍遺道俗重使 遽飛芝檢 徵赴金城 大師以爲道之將行 時不可失 念付囑故 吾其往矣 遂出虎溪 特詣龍闕 於是雪眉淸衆 鷺序羣英 瞻法眼以珠聯 對璧顔以環仰 送至王城舍那院 翌日上幸舍那院 謝曰弟子 望東林以引領 向南澗以傾心 師尊 隨機如飇谷之聲 赴感似月潭之影 瞻依更切鑽仰彌深 越三日 於重光殿開法筵 及乎曳以金襴昇於紫殿 上覩華脣而禪悅 奉蓮眼以精誠 爲其環球申避席之儀 擧國展書紳之志 三益切 十善增修 乃至芬壹城空 衣磨石盡 必也見聖之良因不歇 爲師之美道無窮 卽以服冕 奉爲國師 處處結香火之緣 結師資之禮 仍獻踏納袈裟磨衲襖幷座具 銀甁銀香爐 金釦瓷鉢 水精念珠 大師 潭心有月 嶽頂無雲 一心宣妙覺之風 千眼示大慈之化 上乃大喜曰 弟子聽玄言而達道 承妙旨以知 奉以周旋 不敢失墜 迺於天德殿 高敞法筵 偕願海之千波 爇心香之一炷 大師纔摩塵尾 乍動龍頤 有僧問如何是向上一路 大師曰不從千聖得 又問旣不從千聖得 從上相傳 從何而有 大師曰只爲不從千聖得 所以從上相傳 又問與麽 卽二祖不望西天 達磨不到唐土 大師曰雖不從千聖得 達磨不虛過來 於是人天感心 賢聖喜歡 花雨飛空 檀烟蔽日 彼摩騰赴漢僧會遊吳 其奉佛之大功 歸僧之專媺 無以加也 所謂四方盛賓 萬世永賴 當慧日正中之際 是仁方丕變之時 大師迺言曰 老僧年過桑楡 齒衰蒲柳但願往松門而休足 向金闕而歸心而已 上雖戀慈顔 秪遵玄旨 望象軒而目送 瞻鴈刹以心傾 爾後馳星騎以傳情 飛宸翰而寫懇 迺制誦德詩寄獻曰 慧目高懸耀海鄕 眞身寂寂現和光 具中演法開迷路 鉢裏牛蓮入定場 一喝成音收霧淨 二門離相出塵凉 玄關遠隔山川外 恨不奔波謁上房 仍贄之以鳥程芳荈丹徼名香 用表信心遙祈法力 大師自辭天闕 却到雲山 烟夢更叶於棲遲 水石偏宜於枕瀨 心無限矣 志有終焉 於是擁毳者風趨 攝齋者雲萃 大師色空雙泯 定慧俱圓 行至道於山中 施玄功於宇內 則何異佛者覺也 神而化之矣 顯德五年歲集敦祥秋八月月缺五日 大師將化 盥浴訖 房前命衆 悉至于庭 迺遺訓曰 万法皆空 吾將往矣 一心爲本 汝等勉旃 心生法生 心滅法滅 仁心卽佛 寧有種乎 如來正法 其護之勗之哉 言畢入房 儼然趺坐 示滅於當院禪堂 於戱 應東身者九十春 服西戒者六十九夏 虎溪聲咽 鶴樹色憂 門生銜安仰之悲 山老起其萎之歎 緇白士女 躄踴慟哭 聲振嵓谷翌日 奉遷神座於慧目山 顔色如生 權施石戶封閉 上聞之 慨禪月之早沉 嗟覺花之先落 降之星使 吊以鵠書 追諡元宗大師 塔號惠眞 敬造眞影一幀 仍令國工 攻石封層家 門人等號奉色身 竪塔于慧目山西北崗 遵像法也 大師心燈有熖 定水無波 智惠海融 慈悲雲覆 學佛悟禪之德行 降魔鎭俗之威稜 西遊顯顯之功 東化巍巍之法 遂使盤桃潤色 若木生光 其聖功也不可以知知 其神化也不可以識識 然猶法身無像 必因像而成功 道體無言 必因言而示敎 盍因妙有 以驗眞空 厥有太弟子兩街僧統三重大師盺弘等 法苑鯨鍾 禪門龜鏡 踵慈井之往轍 繼法炬之餘輝 喟然嘆曰 雖然秘說銘心 若不奇蹤刻石 則何以表一眞之法 盡可有矣 於是狀大師行 覬大君恩 請幼婦之文辭 紀吾師之德業 制曰可 乃命翰林學士臣金廷彦 曰故國寺慧目大師 行高雲水 福潤人間 汝宜鴻筆書勳 玄碑紀茂 臣顫汗四匝拜稽首曰 臣夜繩易惑 空縷難分 以淺近之麽才 紀玄微之景行 其猶蟾宮攬月 驪海探珠矣 設使蒼天倚杵之時 碧海寰裳之際 所望玄功可久 妙蹟猶存 因敢美聖德之形容 庶有補於將來僧史 重宣其義 遂爲銘云
大哉妙覺邈矣眞宗 玄玄示化默默宣風 眞有非有眞空不空 蓮開水上月出星中 溥率見之人天仰止 注意玄河歸心佛理 味之禪悅飫以法喜 誰其有之惟我師矣 蔚爲將聖欽若空王 傳心寂住抗跡揮光 乘杯泛泛捨筏堂堂 去傳迦葉來化扶桑 佛日再中法雲丕冒 邦國師資君臣邂逅 可料禪庭俄頃惠搆 鷄足潛輝龍頤過遘
開寶八年龍集淵默十月日 立 刻字李貞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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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