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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을 폐하고 일으키는 것이 세상 가르침에 관계가 없고 유자(儒者)로서 힘쓸 바가 아니다. 또한 폐하지 못할 한두 가지 일이 있는 것은 그 고적이 명승지로 천명된 바가 전하는 까닭이다. 신륵이란 절이 고려시대의 나옹(懶翁)이 머물러 있었으며 연하의 성한 경치가 이루어지므로 시에는 목은(牧隱)을 비롯한 제현(諸賢)의 글이 있으며 높은 탑과 오래된 비가 늘어진 고목과 적막한 연하 사이에 여기저기 착잡히 서있는 것이 예스럽고 여주는 산수로서 여강상류에 이름이 높고, 산천이 기이하고 청수하고 그윽하고 고요하고 평원하고 조망이 좋으며 높고 서늘한 것이 절에 또 겸하여 있으니 그 경치가 절승한 지경 같다. 오직 이 두 가지의 천명으로 팔역 중에서 일컬어 온지가 이미 천 년이나 되었으니 어찌 유자가 힘쓰지 못할 바를 폐하리오. 그리고 옛적에 우리 세조대왕께서 한절을 두고 세종능침의 도량(道場)으로 삼으려 하였더니 위의 뜻이 심히 긴하였으되 성취하지 못한 것은 예종릉이 영릉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일자(日者, 지사)의 말을 들어서 영릉을 여주 북방으로 왕릉을 옮겼다. 세조 왕비께서는 선왕의 유지로서 조정 신료들에게 전교하였다. 이때에 신륵사가 왕릉에 가까움으로써 절을 따로 창건할 것이 아니고 신륵사를 더 개척하고 확대하고 불경을 간행하고 남은 경비를 반포하고 근신을 명하여 그 일을 감독케 하여 수리할 데는 수리하고 새로 지을 곳은 지으니 모두 이백여 간이라 아름답다. 성조 성비의 선왕을 받들고 그 일을 계속하는 뜻이 이와 같으니 크게 나타남과 빛남이 비록 고고하고 절승한 경치가 아니더라도 이점이 더욱 폐하지 못할 의리가 크다. 이후로 몇 번이나 흥폐를 겪었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옛적에 우리선조 문충공이 재물을 덜어서 수즙하고 족증조 의정공이 또 재력을 거출하여 수리하고 다스렸으니 이는 곧 우리 집에 전해오는 일이다. 그 후 백십 년래로 또 다시 훼손됨이 심하여 전각이 기울어지고 무너져서 그 불상을 보호할 수가 없이 되고 두서너 중들이 겨우 향화를 그치지 아니할 뿐이더니 우리 순조왕후가 들으시고 탄식하시되 “이 절이 멀리 있기 때문에 실상 구원하는 길이 끊어졌으나 그 맘대로 피폐하게 두고 돌아다보지 않는 것은 마땅치 아니하다” 하시고 급히 내탕전(內湯錢)을 내리시고 군수에게 명하여 수리케 하시고 곤성(坤聖, 왕비)이 또 도우시어 준공케 하시니 신이 명을 받잡고 조심하고 조심된 마음으로 재물을 모으고 기술자를 구하여 비로소 일을 시작하였다. 공비(公費)가 부족한 것은 따로 찬출하려 몇 개월이 지나서 준공하니 장불전(藏佛殿, 부처를 모신 전각), 선료(禪寮, 참선하는 방), 종루(鐘樓), 향주(香廚, 향화 받드는 부엌)를 환하게 고쳐서 흐르는 듯한 단청과 운치는 중천에 색색이 빛나고 세로 난간과 가로 난간에는 구름이 어리고 방울과 목탁소리는 바람에 사귀고 중과 속인들은 높이 우러러 보며 뛰고 뛰며 찬송치 않는 자가 없으니 슬프다. 우리 성모는 성인이시라 어찌 부처에게 아첨하며 복을 구하고자 이런 일을 하시리오. 이는 선왕을 계승하는 성인의 뜻에서 나온 것이요 또 유사를 번거로이 두지 않고 특히 신에게 명하여 감독케 하신 것은 성모께서 탄강하신 고향이시고 일찍이 선왕이 유의한 바가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가 영(靈)이 없다면 모르거니와 만일 영이 있다면 슬기로운 햇빛이 항상 비치고 인자한 구름이 두루 덮여서 선침(仙寢)을 내어서 보호하고 보위(寶)는 한이 없이 면면히 전하게 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다만 서방노자(西方老子)의 법력으로만 미칠 바리로 곧 우리 성모께서 하시는 일이 대소자간 천리에 합하심이 옛말에 “천리를 순회하여 행하면 저절로 길한 일을 만난다.” 하였고 시에 또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아름다운 군자여 복구하기를 다시하지 않는다.” 하였다. 성모계서 복을 구함에 뜻이 없으시되 복력이 중생에게 스며드는 것이 길이길이 다함이 없으리라. 아성하다 이 점이 후일에 증거를 보여주지 아니할 수 없겠기에 삼가 쓰기를 이와 같이 하고 그 공사의 전말과 비용이 얼마냐는 것을 파편에 기록한다.
神勒寺重修記
佛宇之廢興無關乎世敎而儒者之所不務也然亦有一二不可廢者以其古蹟之攸寄而勝境之攸擅也神勒之爲寺創自麗代懶翁之所住錫白雲之所留詩又有牧隱諸賢之所題記穹塔荒碑錯落離立於寒烟古木之間者如其古也驪以山水名於上游而奇秀窈窕平遠爽塏寺又兼而有之者如其勝也惟是二者之擅稱於域中已爲千年所則豈可以儒者之所不務而廢之與昔我 惠莊大王欲置一寺爲 英寢道場 聖志甚殷而未就 昌陵在宥用日者言灤遷 英寢于驪之北 貞憙聖妃以 先王遺旨敎于廷臣時以神勒寺密邇珠邱不別創造卽其寺而增拓開廣 特頒刊經餘財命近臣董其事葺舊創新摠二百有餘間美矣哉 聖祖聖妃奉先述事之義若是其丕顯丕光雖微古與勝此尤不可廢之大者自是厥後不知其幾經廢興而昔我先祖文忠公捐財而營葺之族曾祖議政公又出力而修治之是則家傳故事也其後百十年來又復陊剝轉甚殿宇傾圮殆不能庇其金身而數三緇徒廑持香火而已我 純元聖母聞而嘆曰此寺遠有故實斷不宜任其廢而不顧也亟頒帑貨 命臣營治 坤聖又佽助而夾成臣承 命兢怵聚財鳩工爰始斧鉅工費不足者別爲營辦閱幾月而工告藏佛殿禪寮鐘樓香廚奐然改觀流丹韻碧絢燿中天欄楯俛雲鈴鐸交風緇俗頂瞻莫不踊躍讚頌噫我 聖母聖人也豈欲佞佛而邀福爲此檀施寔出於繼述之 聖意而且不煩有司 特命臣管董者以其桑梓之鄕而祖先之所嘗致意者存焉耳然謂佛無靈則已佛若有靈慧日恒照慈雲遍覆護 仙寢於來玆綿 寶籙於無彊是豈但西方老子法力所庇卽我 聖母施爲動合天理古語云順理而行自與吉會詩于不云乎愷悌君子求福不回 聖母無意於其求而福澤之渗漉於衆生者永無窮已嗚呼盛矣是不可以無徵謹書之如此若其工役之始卒費用之幾許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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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