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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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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光武) 황제의 비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아버지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이고 어머니는 이규년(李圭年)의 딸이다. 1851년(철종 2) 여주에서 태어났다. 명성황후는 대대로 훌륭한 가문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 황후의 가문인 여흥 민씨 삼방파는 민시중(閔蓍重), 민정중(閔鼎重), 민유중(閔維重) 3형제 이후로 약 300년 동안 문과급제자 70인, 부원군 3인 등 정3품이상 당상관만 127인을 배출한 조선의 명문가다. 이런 집안 환경의 영향으로 황후는 비록 9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현숙한 어머니와 양오빠 민승호(閔昇鎬)의 가르침 아래 손색없는 명가의 규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

명성황후는 무척 영리했다고 한다. 한 번 본 책이나 한 번 만난 사람을 잊지 않고 정확히 기억하여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하였다. 이런 딸에게 민치록은 일찍부터 글을 가르쳐 주었는데 명성황후가 어릴 때 공부하던 방이 있던 곳에 지금은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가 서 있다.

어느 날 명성황후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동네 우물가에 갔을 때의 일이다. 우물가에는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도 하고 물을 긷기도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중의 한 여인이 저녁거리로 좁쌀을 씻고 있었다. 어린 명성황후가 이를 보고 ‘나도 이 좁쌀만큼이나 많은 하인들을 데리고 살아봤으면…’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여주를 떠나 한양에서 생활하게 된 명성황후는 1866년(고종 3) 3월, 친척이었던 흥선대원군 부인의 추천을 받아 16세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명성황후는 타고난 총명을 바탕으로 대궐 안의 수많은 서적들을 읽으면서 탁월한 식견을 갖추게 되었고 마침내 시아버지 대원군의 10년 섭정이 끝나자 본격적인 조선왕조의 근대화작업에 착수하였다. 1881년(고종 18)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하고 청나라에 영선사(領選使)를 보내어 서구유럽의 선진문물과 기술을 배워오게 하는 한편 외국의 유능한 인재들을 불러 국정의 자문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개혁조치들은 곧 내부의 반발에 부딪혔다. 신식군제에 대한 구식군인들의 소외감이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흥분한 군인들이 궁궐을 침범했을 때 명성황후는 극적으로 탈출하여 여주에서 잠시 머물다 장호원으로 옮겨가 50일 만에 환궁을 한 적도 있었다. 또한 명성황후의 점진적 개혁에 대한 급진개혁파들의 불만은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터져 나왔다. 급진파들은 일본의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하기를 원했고 명성황후는 남편인 고종을 중심으로 한 왕권중심국가를 소망했기에 이것이 갈등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나라 안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외세가 침투하기 시작했는데 1885년(고종 22) 영국이 거문도를 무단 점령했고 1887년(고종 24) 조선의 외교권을 제한하기 위해 청나라는 영약3단(另約三端)의 조치를 취했으며 일본은 조선의 곡물을 대량 반출함으로써 국내의 식량난을 가중시키자 조선은 할 수 없이 방곡령(防穀令)을 내리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개화에 대한 명성황후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1882년(고종 19) 영국과 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고, 1884년(고종 21) 프랑스와의 수교이후 개신교의 포교가 허락되었으며, 1887년(고종 24)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에 왕실의 상징인 ‘이화(梨花)’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그런가 하면 같은 해에는 경복궁에 전기가 가설되고, 1888년(고종 25) 미국인 여의사가 황후의 전속의로 취임하였으며, 1890년(고종 27)에는 커피와 홍차가 궁중에서 사용되었다. 하지만 1894년(고종 31) 동학혁명을 계기로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충돌하면서 사태는 급박하게 변하였다.

이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자기나라의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을 때 명성황후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을 물리치겠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책을 강구하였다. 이것이 일본을 자극하게 되었고 일본은 조선에서 일본의 국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명성황후를 제거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새벽에 명성황후는 경복궁 옥호루에서 일본인들의 칼에 무참히 시해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잔인무도한 행위였다. 힘없는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노심초사 하던 명성황후는 이때 45세였다.

명성황후의 능은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洪陵)이며 여주시 능현동 생가 앞에는 명성황후 탄강구리비(誕降舊里碑)를 세웠다. 또 장원서(掌苑署)에 감모비(感慕碑)를 건립하였으며 임오군란 때 피난하였던 장호원(長湖院)에는 감모궁(感慕宮)을 두었다.

□ 참고문헌 : 『梅泉野錄』, 『高宗實錄』, 『純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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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