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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원왕후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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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純祖)의 비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이다. 1789년(정조 13) 5월 한양 양생방(養生坊)에서 태어났다. 정조가 살아있을 때 세자빈의 간선을 받았는데 정조는 “원(사도세자의 묘인 현릉원)을 배알하던 날 밤, 길함을 고하는 몽조(夢兆)가 있더니 지금 보니 그 복기(福氣)가 얼굴에 가득하고 행동거지가 하늘로부터 타고나 이른 듯하니 이는 모두 황천(皇天)이 내리신 바요 척강(陟降)하시는 영혼이 명하신 바라 내가 어찌 감히 사람으로서 그 사이에 들어 용훼(容喙)하리오.”하며 흡족해하였다. 그러나 그해 7월 정조가 갑작스레 죽어 삼간택이 미루어졌다. 김조순이 시파(時派)계 인물이었기 때문에 정권을 장악한 벽파(僻派) 세력은 그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아버지 김조순이 정조 시절 다소 중립적인 위치에 있었고 스스로 벽파에게 고개를 숙인 덕분에 수렴청정을 하며 벽파를 이끌고 있던 정순왕후(당시 대왕대비)의 승낙을 얻어 1802년(순조 2) 10월 비로소 왕비로 책봉되었다. 1805년(순조 5)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자 왕비책봉에 반대하였던 김관주(金觀柱) 등 정적들이 제거되고 김이익(金履翼), 김이도(金履度), 김달순(金達淳), 김명순(金明淳) 등 안동 김씨들이 대거 조정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신분질서를 와해시켜 사회의 혼란을 자초하였고 마침내 ‘홍경래의 난’과 같은 대규모 민란을 야기시켰다. 순조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여 안동 김씨를 견제하려 하였으나 풍양 조씨에 의한 또 다른 세도정치를 낳고 말았다. 1834년 순조가 죽자 헌종(憲宗)을 앞세운 풍양 조씨 정권이 등장하였고 순원왕후는 숨을 죽이며 재기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원왕후는 재빨리 ‘강화도령’ 이원범(李元範, 철종)에게 왕위를 계승케 하여 안동 김씨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1857년(철종 8) 8월 창덕궁에서 죽었다. 소생으로는 효명세자(孝明世子, 익종)와 일찍 죽은 아들 하나, 명온(明溫), 복온(福溫), 덕온(德溫) 등 3공주가 있다. 능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인릉(仁陵)이다.

□ 참고문헌 : 『純元王后陵誌』, 『純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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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