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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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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무인시대는 1170년(의종 24) 8월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등이 반란을 일으켜 문신들을 살해하고 의종(毅宗)을 추방한 자리에 명종(明宗)을 세움으로써 막이 올랐다. 이후 이의방 → 정중부 → 경대승(慶大升) → 이의민(李義民)으로 이어지던 무신권력은 1196년(명종 26) 이의민이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제거되면서 최충헌 → 최이(崔怡, 초명은 瑀) → 최항(崔沆) → 최의(崔竩)로 세습되었다. 김약선은 최이의 사위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문하시랑 평장사 김태서(金台瑞)의 아들이다. 1225년(고종 12) 궁궐을 수리할 때 고종은 김약선의 집을 임시 거처로 사용할 만큼 그를 총애했다. 1235년(고종 22) 6월 24일 김약선은 딸이 태자비가 되자 차츰 벼슬이 올라 추밀부사가 되었다. 최이는 자신의 후계자로 김약선을 점찍고 있었다. 물론 최이에게는 애첩인 기생 서련방(瑞蓮房) 소생의 만종(萬宗)과 만전(萬全)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지만 출생에 흠이 있어 문벌 좋은 사위 김약선을 후계자로 내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약선은 엉뚱한 일로 최이의 미움을 사서 죽고 말았다. 최이의 딸이자 김약선의 처인 최씨는 태자비의 어머니로서 궁궐에 드나들 때 가마와 의복을 왕비처럼 하여 세인의 비난을 받던 인물이다. 한번은 김약선이 장인의 부중에 있는 낭자들을 망월루(望月樓) 모란방(牧丹房)에 모아놓고 음란한 짓을 벌인 적이 있었다. 질투심이 폭발한 그의 처가 친정아버지인 최이에게 달려가 “나는 집을 버리고 비구니가 되겠나이다”하자 노한 최이는 감약선과 관계한 여자들을 섬에 유배시키고 누와 방을 없애버렸다. 이런 일이 있은 뒤 김약선은 자신의 처가 종과 간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는데 이를 눈치챈 그의 처가 먼저 최이에게 남편을 무고하여 죽게 만들었다. 뒤늦게 사건의 본말을 알게 된 최이는 크게 후회하며 딸과 간통한 종을 죽이고 딸을 멀리하여 종신토록 보지 않았다. 김약선의 딸은 충렬왕을 낳고 바로 죽었는데 남편 원종(元宗)이 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정순왕후로 추봉되었고 다시 아들 충렬왕이 즉위하자 순경태후로 추존되었다. 1305년(충렬왕 31) 황려현(黃驪縣)이었던 여주는 태후가 탄생한 고장이라 하여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되었다. 시호는 장익(莊翼)이다.

□ 참고문헌 : 『고려사』, 『고려사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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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