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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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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충숙왕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 자는 용연(龍涎), 호는 묵헌(默軒)이며 평장사 민영모의 5세손이다.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지후(祗侯)를 지내고 전중시사(殿中侍史)를 거쳐 예빈윤(禮賓尹)이 되었다. 세자 시절의 충선왕을 호종(扈從)하여 원(元)에 들어갔으며, 교지(交趾)를 정벌하기 위한 논의에서 그의 주장이 황제의 뜻과 부합하여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조열대부(朝列大夫)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귀국 후 좌부승선(左副承宣)에 재직시 원(元)이 일본 정벌을 위해 고려로 하여금 전함(戰艦)을 건조케 하자, 다시 원에 입국해서 첨원(僉院) 홍군상(洪君祥)을 비롯한 원나라 조정 대신들에게 일본 정벌의 불필요함과 무익함을 역설하여 전함의 건조를 중지시켜 왕의 신임을 얻었다. 또한 고려로 환국하여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를 거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고 충선왕 초에 첨의정승(僉議政丞)에 이르러 치사하였으나, 1321년(충숙왕 8) 다시 수정승(守政丞)이 되고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다. 시를 짓는 일로 왕이 보냈던 내료(內僚) 고여주(高汝舟)가 민지에게 백주(白酒)와 청과(靑瓜)를 대접받고 돌아와서는 “민지가 비록 재상이기는 하나 가난함이 비할 바가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함에 왕이 쌀 일백 석을 하사할 정도로 청빈하게 살았다고 전한다. 79세의 장수를 누렸으며 시호는 문인(文仁)이다. 정가신(鄭可臣, ?~1298)이 지은 『천추금경록(千秋今鏡錄)』을 권보(權溥, 1262~1346)와 함께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라는 이름으로 증수(增修)하고 『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을 편찬하였으나 모두 전하지 않는다. 1871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고려사』, 『여주읍지』(1871), 『여흥민씨삼방파보』, 『고려묘지명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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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