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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흥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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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열전(列傳) 이색(李穡) 편에서 목은 이색이 말하기를 “시중 이성계(李成桂)는 조그마한 집에서 성장하였는데 재상이 되자 전민(田民)을 많이 점탈하고 한꺼번에 큰 집 3채를 지었다. 그리고 좌사 염흥방 역시 수탈을 일삼으니 나라를 그르칠 자는 반드시 이 두 사람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염흥방이 1376년(우왕 2) 이인임(李仁任)을 탄핵하는 상소에 연루되어 금사면(金沙面)으로 귀양을 왔다. 본관은 서원(瑞原, 지금의 파주)이고 자는 중창(仲昌), 호는 동정(東亭)이며 곡성부원군 염제신(廉悌臣)의 아들이다.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장원급제한 뒤 좌대언을 거쳐 1362년 지신사로서 홍건적을 물리치고 송도(松都)를 탈환한 공으로 이듬해 이등공신에 책록되고 위위윤(衛尉尹)으로 승차되었다. 이어 밀직부사를 거쳐 1367년에는 밀직지신사가 되었고 1374년 제주도에서 목호(牧胡)의 난이 일어나자 도병마사가 되어 최영(崔瑩)등과 함께 출전하여 원(元) 출신의 목자(牧子)들을 진압하였다. 1375년(우왕 1)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이인임의 뜻에 거슬려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지고 삼사좌사가 되었다. 유배에서 돌아온 염흥방은 자신의 몸을 보전키 위해 이인임, 임견미(任堅味)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염흥방은 이들과 어울리면서 문신들을 축출하고 매관매직을 자행하는가 하면 백성의 토지와 노비는 물론 나라의 땅까지 차지하는 등 비행을 일삼다가 결국 조반(趙胖)의 사건으로 처형을 당하고 만다. 금사면 금사리(金沙里)는 염흥방의 유배지이자 별장이 있던 곳이다. 염정승동, 염정승평, 염정승굴, 정자천, 주자천, 와룡암, 침류정(枕流亭) 등은 염흥방이 시가(詩歌)를 즐기며 당대 명사들과 어울리던 곳이다. 염흥방이 죽은 후에 그의 두 아들인 염치함(廉致諴)과 염원보(廉元輔)도 이곳에 내려와 숨어 살았다. 염흥방의 후손들은 용담리(龍潭里)로 거처를 옮겨, 대를 이어 살면서 한때 ‘용담 염씨’로 본관을 바꾸기도 했는데 염흥방의 비극적 생을 교훈으로 삼기 위해 “허영심을 내지 말고 가난해도 즐거워하라”는 말을 가훈으로 삼았다고 한다. 저서로는 『동정집(東亭集)』이 있다. 1760년(영조 36)에 편찬한 『여주목읍지』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고려사』, 『고려사절요』, 『여주목읍지』(1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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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