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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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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대표적인 문장가로서 ‘사종(詞宗)’이라 일컬어지는 이가 바로 백운거사 이규보이다. 본관은 여주이고 초명은 인저(仁氐), 자는 춘경(春卿)이며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하였다. 22세 때 사마시에 응시하려던 중, 꿈에 규성(奎星) 즉 이십팔 수 중 하나로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별이 나타나 이서(異瑞, 길조)를 보(報)하여 장원 급제한 뒤부터 이름을 규보라 고쳤다. 글을 잘 지어 9세 때 이미 기동(奇童)이라 이름이 나 있었다. 이규보는 술을 좋아하여 사마시에 3차례나 떨어졌다. 그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백운소설에 “당나라 백낙천(白樂天)과는 음주와 광음영병(狂吟詠病)이 천생 같아 낙천을 스승으로 삼는다.”라고 쓸 정도로 시주(詩酒)를 즐겼다. 또 시와 술 외에 거문고를 즐겨 스스로를 삼혹호(三酷好)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만 2,000수 이상의 시를 남길 정도로 시를 사랑한 이규보에게 시는 떼어버릴 수 없는 마(魔)와 같은 존재였다. 이규보를 두고 같은 시대를 살았던 진엽(陳曄)은 “적선(謫仙)의 일기(逸氣)가 만상(萬象)밖에 서있는 것 같다”고 하였고, 최자(崔滋)는 “일월(日月)과 같아서 감히 칭찬할 수가 없는 천재의 준일(俊逸)한 분”이라고 평하였다. 이규보에게는 개성 서쪽 교외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아담한 별장이 있었는데 사가재(四可齋)라 이름 하였다. 농토가 있어 가히 양식을 공급할 수 있고, 뽕밭이 있어 가히 누에를 쳐서 옷을 지을 수 있고, 샘물이 있어 가히 마실 수 있고, 나무숲이 있어 가히 땔감을 조달할 수 있으니 마음에 가한 것이 4가지가 있으므로 사가재라 명명했다. 이곳에서 전원생활의 정취를 맛본 이규보는 장차 고향인 여주로 돌아와 태평세월의 농수(農叟)가 되려는 결심을 굳힌다. 그러나 몽고군이 고려를 침략하자 임금을 따라 강화도로 피난한 후 그곳에서 74세를 일기로 숨졌다. 문집으로 『동국이상국집』이 있고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1760년(영조 36)에 편찬한 『여주목읍지』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동국이상국집』, 『여주목읍지』(1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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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