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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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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4년(중중 39) 4월 경상도 통영의 사량진(蛇梁鎭)에서 왜변(倭變)이 일어났다. 이때 여론을 주도하며 왜인들에게 강력하게 대처할 것을 임금에게 주청한 사람이 경혼이다. 경혼의 주장은 “요사이 조정의 일을 보면 왜인들을 접대함이 너무 지나칩니다. 요청하는 사건은 마땅히 국가의 계획을 참작하고 요량하여 한번 결정한 다음에는 비록 백번을 요청하더라도 들어주지 않는다면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게 되어 그들이 무례한 말을 감히 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난번 일본 국왕의 사신으로 수축(受竺)과 계원(稽圓)이 왔을 적에 상품의 무역을 청하자 처음에는 비록 그 수량을 줄여 사기로 허락했었지만 그 뒤 패만(悖慢)한 언사가 많이 나오자 다시 의논하여 개정해서 마치 외구(畏懼)하는 듯하여 국가의 체면이 깎이었으므로 여론이 매우 분개하였습니다. … 또한 통역을 맡은 통사(通士)들이 뇌물을 받아먹고 왜인들의 외람된 술책이나 패만한 말은 물론 소소한 것이라도 모두 전달하고 우리 선위사(宣慰使)의 말을 그들에게 누설하니 징계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일본의 도발에 대해 항구적인 대책 없이 끌려만 가던 조선은 마침내 50년 뒤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게 된다. 경혼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언회(彦晦)이고, 경세청(慶世淸)의 아들이며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1522년(중종 17) 진사가 되고 153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장령·헌납·직강을 거쳐 사간이 되었다. 사간으로 있으면서 기묘사화(己卯士禍)때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원(伸寃)을 청하였다. 이후 우필선·집의·판교·직제학·대사간·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 부제학으로 있을 때 시속(時俗)을 바르게 하는 일로 8개항의 상소를 올렸다. 1551년(명종 6)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보우(普雨)를 중용하고 선교(禪敎) 양종(兩宗)의 선과(禪科)를 설치하려 하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기신재(忌晨齋)의 시행도 극력 반대하여 언관으로서의 바른 모습을 보였다는 평을 얻었다. 이후 예조·이조·호조·병조참의를 거쳐 좌부승지가 되었으나 원래 병약한 몸인데다 노쇠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장례원 판결사·오위장 등을 역임한 뒤 70세에 타계하였다. 묘는 흥천면 상백리(上白里)에 있다.

□ 참고문헌 : 『중종실록』, 『명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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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