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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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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덕봉(天德峰) 기슭 아래 금반형(金盤形)이라는 명당 자리가 있는데 여기에 집터를 잡으면 36대를 두고 장상(將相)이 난다 하여 그 소문이 국내는 물론 중국에까지 퍼져 있었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온 명의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금반형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기록을 중국으로 가져갔던 모양이다. 훗날 사신이 되어 중국에 갔던 김관주가 이 기록이 담긴 문헌을 이여송의 후손으로부터 건네받았다. 김관주는 귀국하여 관직에서 물러난 뒤 여주 흥천면 외사리(外絲里)의 금반형에 와서 아흔아홉 칸의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김관주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일(景日)이고, 아버지는 영조의 장인인 김한구(金漢耉)의 사촌동생 김한록(金漢祿)이다. 1765년(영조 4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홍문관교리를 지냈다. 정조 시절에는 크게 쓰이지 못하다가 순조가 즉위하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이조참판·이조판서·광주유수를 거쳐 1802년(순조 2) 우의정이 되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찬동하였던 벽파의 실세 김구주(金龜柱)의 누이로 벽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어린 순조를 대신해서 권력을 쥔 정순왕후는 친정 6촌 오빠인 김관주를 요직에 앉히고 심환지(沈煥之), 김달순(金達淳) 등 벽파 인사를 대거 기용하였다. 이들은 정조의 탕평을 보좌했던 인물들을 제거하는 한편 천주교 박해를 시작함으로써 강력한 벽파 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그러나 1805년 정순왕후가 죽자 벽파는 다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동안 실권을 잡고 있던 김관주는 정조의 뜻을 배신한 죄와 왕비의 삼간택(三揀擇) 방해를 방조한 죄목으로 탄핵되어 함경도 경흥으로 유배 가던 도중 죽었다. 김관주의 몰락 후 등장한 순조의 장인 김조순(金祖淳)은 나이 어린 왕을 보좌하면서 안동 김씨(安東 金氏) 세도정치의 서막을 열게 된다. 김관주는 후에 신원되었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 참고문헌 : 『영조실록』, 『정조실록』, 『순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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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