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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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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정조 24) 2월에 세자빈의 간택이 있었다. 보통은 초·재·삼간택의 절차를 밟아야 하나 정조와 궁궐 내부에서는 이미 초간택에서 김조순의 딸로 마음을 정하였다. 김조순의 딸이 그만큼 출중하였기 때문이다. 김조순의 본관은 안동,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이고, 초명은 낙순(洛淳)이다. 영의정 김창집의 4세손이며 부사 김이중(金履中)의 아들이며 순조의 장인이다. 1785년(정조 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고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뽑혔다. 1792년 동지사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조참의·검교·직각을 거쳐 1800년 보덕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6월 정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순조 즉위 후 국정을 총괄하였다. 김조순이 서장관으로 청(淸)에 갈 때의 일이다. 그가 1787년 예문관에 근무하면서 당송(唐宋)시대의 패관소설(稗官小說)들을 읽으며 한가로이 지내다가 정조에게 적발되어 단단히 혼이 났던 사건이 다시 불거져 나왔다. 이에 김조순이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한 함사(緘辭)와 시문(詩文)을 지어 올렸는데 이것이 임금의 심금을 울렸다. “누군들 허물이 없겠는가마는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대체로 학자들이 자품이 높다 보면 멀리 있는 것에 마음이 치닫고 재주가 있다 보면 밖으로 내닫는 법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름을 알고서 고치기를 꺼리지 않고 다시 범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 함답을 보니 문체가 바르고 우아하고 뜻이 풍부하여 무한한 함축미가 있음을 깨닫겠다. 촛불을 밝히고 읽고 또 읽고 밤 깊은 줄도 모르게 무릎을 치곤하였다. … 지어 올린 시와 문을 보니 문은 사람이 늘상 먹는 곡식 같고 시는 비단이나 자개 같았다.” 순조 즉위 후 김조순은 부제학·병조판서·이조판서·선혜청제조 등 여러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항상 조심하는 태도로 사양하였다. 딸이 순조의 비가 되자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지고 훈련대장·호위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1832년(순조 32) 4월 김조순이 죽으니 순조는 애통해 하며 성복(成服)하는 날에 망곡(望哭)을 하고 손수 제문을 지었다. 김조순이 죽은 지 1년이 되자 “황려(黃驪, 여주)는 충문공의 장구(杖屨)와 의관(衣冠)을 간직한 곳이니 사당을 세워 달라”는 관학 유생들과 지역 선비들의 상소가 있었다. 임금이 곧 원액(院額)을 내려주었는데 ‘현암(玄巖)’이라 하였다. 김조순의 묘는 원래 흥천면 효지리(孝池里)에 썼다가 1841년(헌종 7) 이천의 부발(夫鉢)로 이장하였다. 저서로 『풍고집(楓皐集)』이 전하며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 참고문헌 : 『정조실록』, 『순조실록』, 『철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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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