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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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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응림(應霖), 호는 우암(寓菴)이다.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김환(金丸)의 현손이자 안원군(安原君) 김공량(金公亮)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성품이 총명하고 뛰어나며 행동거지가 장중하여 숙부 김공망(金公望)이 기특하게 보고 사랑하여 크게 될 그릇이라고 여겼다. 부친 김공량은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해 세상사에 대한 뜻을 끊어버리고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면서 자제와 조카들을 가르쳤다.

1531년(중종 26) 진사시에 급제하고 1532년 반궁(泮宮,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도량(度量)이 아주 크고 희노(喜怒)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문장과 언의(言議)가 뛰어났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대곡(大谷) 성운(成運),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관물재(觀物齋) 민기(閔箕) 등과 특히 교우(交友)가 깊었다. 1533년 모재 김안국을 여주 이호촌(梨湖村)에서 배알하여 가르침과 칭찬을 들었다.

1539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541년 김안국의 천거로 한강변(현재의 서울시 옥수동) 동호(東湖)의 송월암(松月菴) 서쪽 기슭에 있던 독서당(讀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퇴계 이황,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하서 김인후,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관물재 민기, 죽애(竹崖) 임열(任說), 국간(菊磵) 윤현(尹鉉) 등과 함께 남루(南樓)의 왼쪽에 작은 누(樓)를 세운 후 이름을 문회당(文會堂)이라 짓고 수계(修禊)하며 강독(講讀)하였다.

1544년 사가독서(賜暇讀書)가 끝나고 시강관이 되어 주역(周易)·강목(綱目)·서전(書傳) 등을 진강(進講)하였는데 특히 서전(書傳)에 능통하였다. 후에 여러 번 전경문신(專經文臣, 특정한 경전에 전공을 지닌 문신)에 올랐으며 이조정랑을 비롯한 대사성·대사간·한성부우윤·대사헌·전라도관찰사·황해도관찰사·개성유수·예조참판 등의 여러 관직을 지냈다. 1560년(명종 15) 문장양망(文章養望)으로 선발되고 왕명을 받들어 배율(排律)을 지어 올렸으며 정유길(鄭惟吉), 민기(閔箕), 심수경(沈守慶), 이량(李樑), 이이(李珥), 임수(林洙) 등과 함께 팔문장(八文章)이라 불렸다. 또한 정유길(鄭惟吉)과 함께 문형(文衡)에 천거되기도 하였다. 1563년 9월 종계변무(宗系辨誣, 조선 왕통을 바르게 고쳐 잡는 일)에 대한 주청사(奏請使)로 북경에 갔으며 그 성과를 정리하여 “황제의 명으로 국조(國祖) 부(父)의 성휘(姓諱)를 분명히 고치었습니다”라고 명종에게 보고하였다. 마침내 명(明)의 역사책에 잘못 기록된 조선 왕통(王統)을 수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주는 북경에 들어가면서부터 이질(痢疾)에 걸려 어지럼증과 발열 증세로 고생하다가 9월 17일 북경 옥하관(玉河館)에서 죽고 말았다. 이에 임금은 예조판서를 추증(追贈)하고 전(田) 30결과 외거노비 5명을 하사하였다. 선조대에 이르러 종계변무 문제가 완전 타결되자 1590년(선조 23) 김주는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록 되었고 화산군(花山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초서(草書)를 잘 썼고 저서로 『우암유집(寓菴遺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묘는 흥천면 귀백리 백양산 절골에 있다.

□ 참고문헌 : 『명종실록』, 『선조실록』, 『우암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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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