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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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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관찰사 민광훈(閔光勳)에게 민시중, 민정중, 민유중이라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여흥 민씨 삼방파는 이들로부터 비롯되었다. 민시중의 본관은 여흥, 자는 공서(公瑞), 호는 인재(認齋)이고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50년(효종 1) 생원시험에 장원하고 1664년(현종 5) 춘당대문과 회시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이무렵 흑산도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서 왜구들이 좋은 목재를 채취하려고 자주 출몰하였다. 과거급제 후 병조좌랑을 역임했던 민시중이 호남 일대를 돌아보고 흑산(黑山)·임치(臨淄)·자은(慈恩)·비금도(飛禽島)에 진(鎭)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노비와 이속들을 진(鎭) 근처에 살도록 하여 평시에는 둔전(屯田)을 개간하고 무예를 익히다가 비상시에는 배를 타고 방어에 나설 수 있도록 하여 흑산도에서 지속적으로 사람이 살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민시중은 지평·남양현감·이조좌랑·교리·수원부사를 거쳐 1669년(현종 10)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그가 경상도관찰사로 있으면서 남긴 치적이 매우 커 임기를 마치고 경상도를 떠나자 대구(大邱) 백성들이 그의 공덕을 기리는 청덕무휼군졸영세불망비(淸德撫恤軍卒永世不忘碑)를 세워주었다. 이후 민시중은 호조참판·강화부유수를 역임했고, 대사헌 시절에는 현종의 죽음에 따른 시호(諡號)와 승습(承襲)을 청하기 위한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淸)에 다녀왔다. 그 뒤 형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하였다. 민시중은 53세에 죽었는데 재주와 방책은 두 아우에게 미치지 못하였지만 충후(忠厚)함은 앞서 사람들이 선인(善人)으로 불렀다고 한다. 묘는 능서면 오계리(梧溪里)에 있다. 1899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명환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효종실록』, 『현종실록』, 『숙종실록』, 『여주읍지』(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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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