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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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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보지(輔之)이다. 대제학첨의정승(大提學僉議政丞)을 지낸 민지(閔漬)의 증손이자 여흥군 민현(閔玹)의 아들이다. 1380년(고려 우왕 6) 과거급제하여 후덕부승(厚德府丞)에 제수되었고 여러 번 천직(遷職)하여 성균사예(成均司藝)가 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그의 신임을 얻어 군부경력(軍簿經歷)이 되었고, 예조와 병조의 의랑(議郞) 및 우간의(右諫議)를 지냈으며, 조선 개국시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봉되었다. 1393년(태조 2) 내시 이만(李萬)과 세자빈 유씨(柳氏) 사건에 대해 간하다가 태조의 노여움을 사고 순군(巡軍)에 하옥되어 국문을 받았으나 다시 중추원우부승지(中樞院右副承旨)에 제수되었고 곧 도승지가 되었다. 1396년(태조 5)에는 대사헌이 되었고 1397년(태조 6)에는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져 관계(官階)가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고 전라도관찰사로 나아갔다. 1408년(태종 8)에는 사은사(謝恩使)로 명(明)에 다녀온 공으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에 제수되었다. 1409년(태종 9) 충청도관찰사가 되었고 1412년(태종 12) 성절사(聖節使)로 다시 명에 다녀왔다. 1416년(태종 16)에는 공조판서가 되었고 곧 의정부참찬이 되었으며 1418년(태종 18)에는 판우군부사(判右軍府事)가 되었다. 얼마 후 호조판서가 되었고 또 다음해에는 다시 군(君)에 봉해졌다. 1420년(세종 20) 태종의 비(妃)이자 세종의 모후(母后)인 원경왕후(元敬王后)가 승하하자 수릉관(守陵官)으로 국상을 치렀다. 그해 12월 여천부원군(驪川府院君)에 봉해지고 1426년(세종 8)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성품은 항상 온아(溫雅)하였고 근신(謹愼)하게 몸가짐을 하였으며 산업(産業)을 경영(經營)하지 않았다. 항상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죽거든 불사(佛事)를 베풀지 말고 전(奠)도 풍성(豊盛)하게 할 것을 기필하지 말 것이며 정결(淨潔)하게 하는데 힘 써야 한다. 염(斂)을 할 때에는 단의(單衣)를 사용할 것이며 습(襲)을 할 때에는 오중(五重)을 넘기지 말며 염할 때에는 십중(十重)을 넘기지 말아야 할 것이니 만약 이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나의 자손이 아닐 것이다”라고 하였다.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 참고문헌 : 『세종실록』, 『여흥민씨삼방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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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