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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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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 자는 공기(公紀), 호는 한계(寒溪)이고, 초명(初名)은 종렬(鍾烈)이다. 민유중의 현손이자 민우수의 손자이고 민백겸의 아들이다. 1766년(영조 42)년에 문과급제하여 1768년 문학(文學)이 되었다. 교리·필성·응교를 거쳤으며, 1781년(정조 5) 우부승지로서 편집당상(纂輯堂上)에 제수되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찬집하였으며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수원부사 당시에는 마병도시(馬兵都試)를 늦게 시행한 일로 탄핵을 받았으나 정조전문(正朝箋文)을 명할 때 민폐를 제거할 방책을 올려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되었다. 1783년 동지의금부사로 있을 당시 아래 율관(律官)의 잘못으로 삭직 당하였으나 이듬해 관직에 다시 나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787년 동지부사가 되었으나 정사(正使)와의 상피(相避) 관계로 교체되었다. 개성유수 당시에는 여러 가지 폐단을 거론하고 이를 시정할 방책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1790년 대사성으로 있을 당시 과거 시험의 서제(書題)를 기록해두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되었으나 다시 이조참판이 되었다. 1791년에는 관상감제조로 태상신(太常神)을 모시는 방에 비가 새는데도 고치지 않은 죄로 파직되었다. 1793년에는 비변사제조로서 빈대(賓對)에 참석하지 않아 파직되었으며, 1795년 향례연길(享禮涓吉)을 살피지 않아 파직당하였다. 동지겸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청(淸)에 다녀오기도 하였고, 1797년 이조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가 되었을 때 왕에게 정호인(鄭好仁)의 석방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1798년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다가 죽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묘는 여주읍 신진리에 있다. 1899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명환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여흥민씨삼방파보』, 『여주읍지』(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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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