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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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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개의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여옥(汝沃), 호는 회재(晦齋) 또는 서파(西坡)이며, 현감을 지낸 윤계손(尹季孫)의 아들이다. 감안국에게서 글을 배워 1516년(중종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사간원정언·이조좌랑이 되었다. 기묘사화와 관련되어 외직으로 좌천되었다가 한어(漢語)에 능통하여 곧 내직으로 옮겨와 승문원부제조로 있으면서 명(明)과의 외교 활동에 공을 세웠다. 윤개는 성절사(聖節使)·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명의 관리들과 친교를 맺어 1534년 역청(癧靑), 백철(白鐵), 이두석(泥豆錫)의 제조법을 배워 왔으며 명의 조복(朝服)을 얻어와 조선의 관복제도를 개정하였다. 윤개는 1543년(중종 38) 형조참판에 임명되고 인종이 즉위하자 예조판서가 되었다. 명종 즉위 초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 일파를 제거할 때 윤원형 쪽에 가담하여 2등공신에 책록 되고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다. 이일로 권귀(權貴)에 아부하여 너무 사치스럽고 절제가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윤개는 1551년(명종 6)부터 7년 동안 우의정으로 있다가 1558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그가 천거한 헌납 김계(金啓)를 옹호하다가 탄핵되어 삭직되었다. 1563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고 궤장을 받았다. 그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묘는 금사면 하호리에 있다. 1760년에 편찬한 『여주목읍지』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중종실록』, 『명종실록』,『여주목읍지』(1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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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