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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창 부인 여흥 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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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陶菴) 이재(李縡)의 어머니 민씨의 본관은 여흥이고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이며 인현왕후의 언니이다. 15세에 진사 이만창에게 시집을 갔다. 덕이 있고 용모도 아름다워 시댁에서는 경사가 났다고 칭찬이 대단했었다. 1680년에 이재를 낳고 1684년(숙종 10)에 남편이 죽었다. 시어머니를 모실 때에는 병이 크고 작고 간에 반드시 몸소 정성을 다하되 간절하고 지극하게 하였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 시어머니를 모실 때에는 어미를 잃은 그분의 손녀 2명을 집안에서 길렀는데 어른이 될 때까지도 그 손녀들이 자기 어머니가 없는 것을 모를 지경이었다 한다. 도암은 어머니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어머님은 제사를 받들면서 제찬을 정성들여 차리셨고 제기 그릇을 더욱 깨끗하게 하고자 끊임없이 애쓰셨으며 제사를 지내는 중이나 지내고 난 뒤에도 제대로 다하지 못했나 마음 아파 하셨다. 아침마다 닭이 울면 일어나셔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일을 처리하셨는데 일마다 바르게 처리하셨고 안팎의 비복들도 각자가 자기의 일을 맡아서 하였다. 혹시 잘못하는 경우라도 은혜로운 뜻으로 대하였고 배고프고 추운 때에는 먹게 하되 한 차례도 밥을 먹다 일어나게 불러 대지를 않으셨다. 그들이 더러 병이 났다고 핑계대면 ‘사람에게 강요하기 어려운 것은 질병이니 내가 차라리 속임을 당해야지’라고 하셨다.” 또 도암은 “집안에 사용할 재력이 부족하여 늘 근심이었으나 평생토록 남에게서 일전(一錢)의 이자를 취한 적이 없으셨으며 동생이 왕후로 있을 때에도 털끝 하나라도 요구한 적이 없으셨다. 중년에 풍병을 앓으시게 되자 왕후께서 궁중의 여의(女醫)를 보내어 진찰케 하시고 중풍약인 방풍통성산(防風通聖散) 수십 첩을 보내주시면서 “우리 언니 마음에 행여 불안한 마음이 없으실는지?” 오히려 걱정하셨으며 늘 “우리 언니는 높은 선비님이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719년(숙종 45) 이재가 가선대부에 승진되자 도암의 아버지는 이조참판, 어머니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이 추증되었다. 정숙하고 어질었으며 자애로웠던 정부인 민씨는 벼슬에서 물러난 아들과 대거리(大居里), 즉 지금의 여주시 상거동 부근에서 살다가 1728년(영조 4) 9월 19일에 죽었다.

□ 참고문헌 : 『숙종실록』, 『도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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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