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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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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 조선에 유행하던 야담 61가지를 묶어 『천예록(天倪錄)』이란 이름으로 책을 펴낸 이가 있었으니 그가 여주 사람 임방이다.

임방의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자는 대중(大仲)이며 호는 수촌(水村) 또는 우졸옹(愚拙翁)으로 평안도관찰사 임의백(任義伯)의 아들이다. 1663년(현종 4) 사마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고 재랑·장악원주부·호조정랑 등을 지냈다.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유배되자 사직하였다가 다시 단양군수·사옹원첨정 등을 역임하였다. 1702년(숙종 28)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영광군수로 있을 때의 일이다. 임방이 세자시강원의 필선으로 임명을 받아 영광을 떠나게 되었는데 마침 전라병사 이석관(李碩寬)이 순무하는 길에 영광에 들렀다. 임방은 이미 군수의 직위에서 교체되었으므로 모든 마중 절차를 하나도 거행하지 않았다. 이석관이 군리(郡吏)를 잡아서 다스리니 임방이 노하여 병영(兵營)의 사람을 다스렸다. 또 이석관이 객사의 동헌에 들어가 머물려고 하자 임방이 자신이야말로 임금의 근시(近侍)로서 동헌에 머물러야 한다며 그를 몰아내었다. 이 일로 임방은 무신을 능멸하였다 하여 잠시 고신(告身)을 빼앗겼다. 임방은 당시(唐詩)를 좋아하여 『가행육선(歌行六選)』, 『당률집선(唐律輯選)』, 『당아(唐雅)』 등의 시가집을 엮어 낼 정도로 풍류를 아는 인물이었으나 법률의 집행에 있어서는 빈틈없는 엄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여주에서 우거하던 임방은 밀양부사·대사성·대사간·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임방은 연잉군(延礽君, 뒤에 영조)의 세자책봉에 앞장섰다가 신임사화로 함종(咸從)에 유배되었고 금천(金川)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죽었다. 영조 즉위 후 복권되었다. 저서로는 『논어취분(論語聚分)』, 『수촌집(水村集)』 등이 있고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 참고문헌 : 『숙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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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