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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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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起復)이란 상중에 있는 관리를 탈상(脫喪) 전에 복직시켜 기용하는 일을 말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선조 25) 홍성민의 모친이 별세했다. 그가 분상(奔喪)하기 위해 고향으로 떠나자 비변사(備邊司)에서 “익성군 홍성민은 여러 가지로 군국에 대한 모의와 사대문서(事大文書)에 많은 힘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전례에 따라 기복시키소서” 하고 아뢰니 임금이 따랐다. “삼년상(三年喪)은 고금을 통하여 상하가 다 같이 행하는 것이다. 아무리 큰 난리를 만난 시대라 하더라도 반드시 일세(一世)의 치란에 관계되는 사람이어야만 부득이 상중에 기복시킬 수 있다” 라는 실록의 기록으로 알 수 있듯이 아무나 기복시키지는 않았다. 홍성민의 기복에 비변사가 나섰다는 것은 그만한 자격이 그에게 있었다는 반증이다.

홍성민의 본관은 남양이고 자는 시가(詩可), 호는 졸옹(拙翁)이며, 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의 아들로 여주에서 태어났다. 1561년(명종 16)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였고, 156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정자·교리를 지냈다. 1567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대사간·호조참판·부제학·예조판서·대사헌·경상감사·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홍성민이 호조참판으로 있을 때 사은사로 명(明)에 들어가 종계(宗系) 개정(改正)을 청하여 황제의 허락을 받아왔다. 이 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책록 되고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다. 1591년(선조 24)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한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내심 신성군(信誠君)을 마음에 두고 있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 삭탈관직 되면서 실각하자 홍성민도 정철의 일당으로 몰려 함경북도 부령(富寧)으로 귀양 가기도 했다. 홍성민은 매우 청렴결백하여 사사로운 이(利)를 쫓지 않았으며 효성이 지극했고 또 문행(文行)과 정술(政術)이 본받을 만해서 명신(名臣)으로 칭송되었다. 저서로는 『졸옹집(拙翁集)』이 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는 금사면 이포리에 있다.

□ 참고문헌 : 『명종실록』, 『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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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