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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대의 충신으로 본관은 하동이고 자는 백인(伯仁)이다. 사복시정(司僕寺正) 정경복(鄭景福)의 손자이며 군자감정(軍資監正) 정여호(鄭如虎)의 아들로 한성부(漢城府) 아현방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용모와 재주가 출중하여 훗날 인재로서 촉망됨이 컸으며 불과 5~6세에 글을 읽고 글씨를 쓸 줄 알았다고 한다. 일찍이 말하기를 “무릇 선비란 세상에 태어나서 문(文)을 숭상할 것이 아니라 무예(武藝)로써 국난을 극복함도 또한 도리이다” 라고 하며 틈틈이 활과 말을 익히니 1573년(선조 6)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함평현감을 지냈으며 이때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1590년(선조 23) 광국공신(光國功臣) 원종록(原從錄)에 올랐다. 다음 해 부친상을 당하여 여주 옥은동(지금의 흥천면 신근리)에 내려와 우거(寓居)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의 상복을 벗고 손가락을 잘라 격문(檄文)을 써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 격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며 조상의 혈통을 면면히 이어온 백성인데 누구하나 아름다운 백성이 아니겠는가. 저 바다 건너 왜구는 우리와는 민족이 다르고 혈통이 다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우리 강토를 침범하여 우리 백성을 죽이고 재산을 약탈하고 왕실을 괴롭히며 구능(舊陵)을 파헤치니 참으로 우리의 원수라 할 수 있다. 살아서는 의인(義人)이 되고 죽어서는 의혼(義魂)이 될지니 국난을 당하여 충성을 다하고 죽음으로 몸을 던질지어다” 하였다. 그리고 격문을 보고 모여든 사람들로 일대의 부대를 편성하여 무수한 왜적을 격퇴시켰으나 지평의 고라산에서 왜적의 대부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중과부적으로 힘이 다하고 화살이 떨어져 마침내 적환(敵丸)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때 큰며느리 청풍 김씨와 더불어 셋째 아들 정괄, 넷째 아들 정일도 순절하였다. 당시 큰 아들 정적(鄭迪)만이 강원도에 군량(軍糧)을 조달하러 갔다가 화를 면하였는데 비보를 전해 듣고 전장으로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이후 정적은 왜군의 섬멸에 적극 노력하였고 왜란이 끝난 후에는 벼슬을 버리고 잠시 낙향했다가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바로 어가(御駕) 호위를 위해 달려갔으며 그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1725년(영조 1) 양대(兩代) 삼위(三位)에 충효열(忠孝烈)의 정려문을 하사 하였으니 충신은 사후에 병조참판에 추증된 정응린이고, 충효(忠孝)는 정적이며, 효열(孝烈)은 청풍 김씨이다. 정응린의 묘는 흥천면 상백리에 있고, 정응린 일가의 충효열 정려문이 지금도 흥천면 신근리에 남아 있다.
□ 참고문헌 : 『여주읍지』(1899), 『하동정씨대동합보』(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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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