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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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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안동, 호는 동농(東農)으로 예조판서 김응균(金應均)의 아들이다. 1877년(고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참서관이 되었다. 사헌부감찰·장례원주부·인천항 통상사무아문주사·부수찬·주차일본공사관 참찬관과 장령·사복시정·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고, 1887년부터 주일본판사대신으로 4년간 동경에 주재하였다. 1890년 3월 여주목사에 부임하여 1891년 4월 안동부사로 이배(移拜)되었다. 1894년에는 군국기무처회의원이 되어 내정개혁에 참여하였으며 병조참의·외무독판서리(外務督辦署理)·전우국총판(電郵局總辦)·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갑오경장이 실패한 뒤에는 1896년 7월에 조직된 독립협회 위원에 선임되었고 1897년에는 교전소(校典所)의 지사원(知事員)과 황해감사를 역임하였다. 1900년 중추원의장, 1902년 궁내부특진관, 1906년 충청도관찰사를 지냈으며 대한자강회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다. 1907년 규장각제학을 역임하였고, 1909년에는 대한자강회 계승 단체인 대한협회 회장이 되어 친일단체 일진회를 성토하였다. 1910년 국치(國恥) 이후 일제가 수여한 남작(男爵)을 받았다가 반납하고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의 총재 및 고문으로 추대되어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0년 3월에는 대동단 총재의 명의로 포고문·통고문을 배포하였으며 박용만(朴容萬)·나창헌(羅昌憲)·손영직(孫永稷)·고광원(高光元) 등과 공동명의로 거금권고문(醵金勸告文)을 발표하였다. 대동단이 해체된 뒤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으로 활약하였다. 한학과 서예로도 유명하였다.

□ 참고문헌 : 『고종실록』, 『매천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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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